인간의 말에는 바람이 있다. 이를테면, 이해받고 싶은 바람, 이해받고 싶지 않은 바람, 사랑받지 않아도 좋으니 기억에 남고 싶은 바람, 잊혀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사랑받고 싶은 바람 등등. 하다못해 공공 기관의 공지문에 적힌 말에도 공지 내용을 명확히 전달하려는 바람이 들어있으니, 타인과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많은 말에, 그러니까 너무 많은 바람에 노출된 삶을 이어간다는 것과 다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내 친구의 딸은 이제 겨우 ‘아빠, 엄마, 응애’라는 단어만 발음할 줄 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으니, 대단한 성취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조금만 눈썹이 짙은 성인 남자의 사진만 보면 전부 ‘아빠’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진이 대꾸를 하리라는 기대는 없다.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빠아빠 부르지는 않으니까. 아이는 ‘아빠’하고 부른 후, 자신을 바라보는 어른들을 올려다본다. 맞나요? 방금 제 말 들었죠? 하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아이가 아빠가 아닌 이의 사진을 가리키며 아빠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웃고, 아이도 덩달아 웃으니 분위기가 실로 좋아진다. ‘나’를 말하지 못해도, 아이는 아빠라는 단어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된다.
발화하는 자가 스스로 하는 말의 의미를 몰라도, 그 말을 둘러싼 많은 이들이 그 말을 알기에, 말은, 발화자와 관계를 맺으며,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연결하고, 우리들의 욕망을 연결한다. 나는 친구의 이목구비를 쏙 빼닮은 작은 아이의 부드러운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면서 연신 아이의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아이가 알아 들을 거라는 기대는 없이, 그러나 내가 할 줄 아는 가장 호의적인 말을 통해, 나의 호의가 아이와 아이를 둘러싼 이 모든 공기와 관계를 맺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친구는 내 하는 양을 보고, 아이에게 ‘바이바이’나 ‘토닥토닥’이라는 말을 했다. 뭘 하나 싶었는데, 아이는 바이바이에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토닥토닥에는 내 무릎을 살살 두드려주었다. 자기 스스로는 발음을 하지도 못하는 말인데, 공기를 바꾸는 아이의 조그맣고 말랑말랑한 손은 올해 내가 뜻밖에 받은 선물이다.
술을 빚기 좋은 새벽, 누룩의 조용한 움직임을 생각한다. 발효를 시키며 ‘맛있어졌으면 좋겠다’라든가 ‘잘됐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나지막하게 눌러놓았을 사람도 생각한다. 엄밀히 말해, 말에는 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 속에 기원을 담는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그 사람과 관계 맺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말에 아주 힘이 없는 것도 아니리라. 내가 대상에게 건네는 많은 말들이 결국, ‘나’의 고요를 알아차리는 바람이듯이. |